조용하다.
받은 시험지는 흰 줄이 길게 그어져있을 뿐이었다. 텅 비어있는 오선지같았다.
누군가의 볼펜 촉이 떨어지고, 종이에서 굴렀다. 모두 머리를 숙이고 글을 썼다. 조각도를 들고 몰두하는 조각가의 모습 같았다. 수십 명의 조각가가 같은 모양의 작품을 만든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재미없다.
고개를 숙여 마저 글을 써나갔다. 펜을 휘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의자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누군가가 일어선 것이다. 두 번째 의자가 땅에 끌릴 때, 펜을 놓았다. 의자가 밀리며 소리가 났다. 시험지를 내고 시험실을 나왔다.
문이 가볍게 닫혔다. 숨이 트였다.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친구들의 단톡방은 잠잠했다. 그래도 다른 남자들에게서 온 카톡이 몇 개 깔려 있었다.
「지현, 내일 시험이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용민아, 뭐해?”
“공부하는 중, 왜.”
“시험 끝났으니까 술 마셔야지, 나와.”
“나는 시험 안 끝났는데?”
“오늘 시험은 끝났잖아.”
잠시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언제 마실 건데.”
“음, 밤에 마실래?”
“밤에?”
“내일 일정 있어?”
“일정은 없지. 근데 둘이 마셔?”
“따로 부를 친구 있어?”
“없긴 한데... 일단 알았다. 이따가 보자.”
전화를 끊고, 친구들의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저녁 같이 먹을 사람?」
다섯 명이 있는 단톡방인데, 읽음표시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답장을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연호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시험 잘 봤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호, 밥 같이 먹을래?”
“그러든가, 네가 사주는 거지?”
“뭐래, 지갑 챙겨와. 나 밥 사줘”
“북문으로 가면 되나.”
“이미 북문이야. 빨리 와.”
전화를 끊자, 핸드폰이 울렸다.
「시험공부 중, 다음에 같이 먹자.」
친구들의 단톡방 알림이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아쉽다고 답장했다.
“오래 기다렸냐?”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음. 밥은 네가 사는 거지?”
“맨날 얻어먹을 생각만 하냐?”
“그래서 안 사줄 거야?”
“에휴, 사줄게. 뭐 먹을 건데.”
“초밥? 소고기? 육회?”
“저녁부터 무슨 그런 걸 먹어. 안돼.”
“치, 쪼잔하게. 그럼 덮밥 사줘. 연어덮밥.”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시험이 어려웠다느니, 학교생활이 지루하다느니 같은 얘기였다. 식사 후엔 카페에 갔다.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연호는 재밌게 말했고, 별것 아닌 말에도 웃어주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용민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마시러 갈까?」
답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 돼?”
“응, 약속이 있어서, 오늘 재밌었어!”
용민은 북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너 좀 괜찮다, 어디 갔다 왔어?
”...술 어디서 마실 건데.“
술집 거리를 돌아다니다, 청춘에 들어갔다. 칸막이로 나누어진 작은 방에 마주 앉았다.
”밥은 먹고 왔어?“
”응, 연호라고 동아리 친구 있는데, 같이 저녁 먹었어,“
”...그래?“
”안주는 콘치즈로, 술은 참이슬 마실까?“
호출벨을 누르자, 직원이 왔다. 주문을 받아가고, 다시 문이 닫혔다. 잠깐의 정적. 칸막이 너머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 말소리가 넘어왔다. 칸막이로 나눠진 얼음틀에 물을 붓는 것처럼, 넘친 소리는 정적을 채웠다. 용민이 물을 따라주었다.
”동아리는 저번에 말했던 거기인가?“
”맞아, 얘들 다 재밌어. 분위기도 좋고.“
버너와 함께 콘치즈가 나왔다.
”근데 너 활동 엄청 많이 한다. 과에 친구들도 많은데, 동아리까지 하고.“
”시간이 비면 의미없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가?“
”그리고, 나 진짜 친구 없어. 남자애들하고만 친하지.“
”여자애들은 왜?“
”난 그냥 남자애들이 편하던데. 동아리에서도 남자애들하고 말하면 재밌거든? 막, 말도 재밌게 하고, 중간에 말 끊기고 분위기 어색해지는 것도 없고.“
”그런가...“
용민이 말없이 술을 따랐다. 잔이 술로 채워지는 동안 공간의 소리는 비워졌다.
”나도 편해서 만나는 거야?“
”재밌기도 하고.“
지현의 대답은 빨랐다. 잠시의 정적에도 소스라치게 몸부림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적은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술 한 병을 채 비우기 전에, 용민이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만 일어날게.“
”어... 그럴까?“
용민은 계산을 끝내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심심함에 전화를 걸었다. 함께 놀러다녔던 친구였다. 시내로 놀러가자는 말이 나왔다. 잠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내일 시험이 있지만, 오후에서야 보는 시험이었다. 동성로에 도착하자, 활기가 느껴졌다. 울려퍼지는 불빛, 떠도는 사람들, 웃음소리, 말소리, 겹겹이 쌓여 알 수 없는 노랫소리까지. 점원이 손짓했다.
”놀고 가요, 오늘 괜찮은데.“
헌팅포차 안은 음악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금의 공간도 정적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했다. 빈자리에 앉았다. 가벼운 안주 하나에, 술을 주문했다. 친구와 앉아있었지만, 딱히 얘기를 하진 않았다. 마주 보고 앉아 말해 봐야 음악에 덮일 뿐이었고, 어색한 정적 따위가 자리할 곳은 이미 없었으니까. 그리고 줄지어 남자들이 다가왔다.
”같이 게임할래요?“
”저희도 둘인데, 같이 마실래요?“
”너무 예쁘셔서...“
몇 번인가 남자들을 돌려보내고, 그나마 괜찮은 남자들이 찾아왔다. 지현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각자 자리에 앉아 얘기를 계속했다. 음악이 가득한 곳에서, 남자들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흔한 술자리의 뻔한 수작들, 나이가 몇인지 묻고, 맞춰보라고 질문하며 서로 웃기고 웃었다. 손길은 가득찬 소리 속에 자연스럽게 몸에 닿았다. 어깨선을 따라 허리, 허벅지에 올라왔다.
”음악 소리 때문에 뭐라는지 안 들리는데, 자리 옮길래요?“
친구의 말에, 남자들은 그러자며 일어섰다. 딱히 이곳이 싫지 않았지만, 혼자는 싫어 따라 일어섰다. 동성로 골목골목으로 들어가 자리한 곳은 은은한 조명의 분위기 있는 술집이었다. 소고기 전골은 맛있었다. 이전 포차와는 다르게, 이곳은 다른 테이블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였다. 남자 한 명이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웠다. 지연은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돌아왔을 땐, 친구와 다른 남자가 사라지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남자만이 돌아와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둘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간의 소리가 비자, 옆 테이블의 잡담이 넘어왔다.
”우리도 일어날까요?“
남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골목길을 걸어 나왔다. 대로에 이르자, 소리로 가득했다. 큰 음악이 울리는 곳에서 지현은 멈췄다.
”오늘 재밌었어요.“
그렇게 남자를 보내고, 지현은 소리를 따라갔다. 소리의 진동에 몸이 울렸다. 클럽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새에는 묵직한 음악이 욱여넣어졌다.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틈이 없었다. 의미 없는 정적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음악은 일정하게 두근거리며, 몸을 달궜다. 테이블을 찾아 목을 축였다. 음악은 언제나 정점이었고,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는 속삭임만 같았다. 가득 쌓인 소리로부터 모두들 격렬하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손길이 몸에 닿았다. 누군가는 어깨에 누군가는 허리에, 누군가는 골반에 손을 얹었다. 굳이 쳐내지 않았다.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고, 맞붙어 오는 상대의 존재를 느꼈다. 뒤돌아 상대를 확인하지 않았다. 좀 더 격렬하게 몸을 맞닿을수록, 텅 빈 틈의 굴곡을 맞붙일수록, 남자의 단단한 살점을 느끼는 나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존재함을 느끼게 해주는 감각들이 있었다.
남자가 밖으로 손을 끌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다른 남자가 찾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찾아왔다. 훤칠하고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관계 맺는 것보단 지금 이곳의 소리가 좋았다. 거대한 소리가 온몸을 휘감아 안는 충만함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 원한 것을 얻은 사람들과 포기한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만큼의 공터를 소리가 메꿨다. 소리는 스피커에서 흘러, 모든 얼음틀을 꽉 채울 것만 같이 쏟아졌다. 하지만 결국 소리는 사라진다. 한산해짐에 따라 소리도 잦아들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했다. 남자에게 다가갔다.
술기운은 시간에 흘러갔고, 피곤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집까지 돌아가기는 싫었다. 혼자 택시를 타고 기사와 어색한 정적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고, 무슨 말이라도 들을 것만 같은 불편함이었다. 그래서 남자와 함께 모텔에 왔다.
말리는 게 지루한 머리카락을 남겨두고, 어깨 아래로만 씻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두었다. 남자가 씻고 나왔다. 불을 끄자, 텔레비전 조명에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퍼지듯 남았다. 익숙하게 올라오는 남자와 입을 맞췄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배를 타고 올라와 밑가슴을 쓸어올리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어진 입술로 혀를 타고 가쁘게 숨이 넘나들었다.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손길에 소리를 흘렸다. 남자가 움직임에 소리가 맞춰 커져갔다. 쾌락에 몸의 감각마저 뭉개지고, 소리만이 남았다. 존재를 탄생시키는 신음이었다. 지현은 자신의 신음을 따라 소리냈다. 흡사 짓누르는 존재의 압박감에서 살아남으려는 비명과도 같았고, 날아갈 것 같은 존재의 나약함을 붙잡아 두려는 애원과도 같았다.
그러나 정적은 언제나 자리를 찾았다. 남자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소리를 내었다. 몸에 힘이 없었다. 지치고 피곤했다. 외국 방송인지 소리를 이해할 순 없었다. 전화벨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곧 퇴실 시간인데, 연장할까요?“
아니라고 말하고 이불을 걷었다. 곧 12시였다. 남자는 사라졌고, 텔레비전도 꺼졌다. 옷을 입으려다 몸이 찝찝해 몸을 씻었다. 어깨선 아래로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곧바로 학교로 출발했다. 택시를 잡고,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았다.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소리가 넘쳐 밖으로 샐 정도로. 교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정리한 노트를 훑어보고는 했다. 교수님이 들어왔다. 이어폰을 빼는 순간, 소리는 사라졌다.
”시험은 지금으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오후 3시까지 진행하겠습니다.“
종이가 팔락이며 넘겨졌다. 끝자리에 앉은 지현에게까지 도착한 종이는 텅 비어있었다.